최대다수의 최대행복

0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고안해낸 제라미 벤담은 결코 겸손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숨을 거둔 뒤 자신의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전시함으로써 후대의 철학자들로 하여금 위대한 철학자의 시신을 보며 자극을 받을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신 머리부분의 방부처리 상태가 좋지 않아 한동안 목 위엔 밀랍으로 된 가짜 머리를 얹고 진짜 머리는 접시 위에 놓인채 두 발 사이에 두고 전시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나중에 학생들이 그의 머리를 훔쳐다가 자선기금을 내놓겠다는 대학측의 약속을 받아내기위한 인질(?)로 사용했는데, 그 뒤로는 지하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벤담은 죽어서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기여한 셈이다.

0 개의 댓글:

1984 - 조지오웰

0
서문
 
1984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 스탈린 주의와의 비교이거나 개성의 상실, 비팍적 사고의 부재와 같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우려이다. 하지만 나는 전체주의의 잔악성이나 체제에 의한 개인의 파멸 보다는 빅브라더의 세계, 당이 구축해 놓은 현실에 대해 생각해봤다. 소설속에서 빅브라더로 대표되는 당은 모든 개인을 완벽하게 통제하려한다. 이중사고를 강요하며 과거를 조작하고 당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을 대중에게 심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여기서 이중사고란 작중에서 필요에 의해 스스로의 기억을 기술적으로 조작하는 능력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예를들어 사과는 정육면체에 가깝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게되면 사과는 둥글지 않으며 정육면체에 가깝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곤 곧 그러한 기만행위를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사과는 정육면체 모양이며 지금까지 죽 그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작중에서 오브라이언이라는 인물은 당에 반하는 사상을 지닌 윈스턴을 고문하며 앞서 얘기한 이중사고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정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물질도 지배할 수 있네. 실재란 머릿속에 있지…(중략)…무엇이든 할 수 있다네. 원한다면 비누방울처럼 이 마루 위를 둥둥 떠다닐 수도 있지." 윈스턴은 이러한 세계관은 유아론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려 하지만 오브라이언은 그런 윈스턴에게 "이건 유아론이 아니네…(중략)…사실은 정 반대이지."하고 선수를 친다. 나는 바로 이부분에 주목했다. 빅브라더의 세계가 무엇인지, 감시와 통제, 과거조작으로 구축한 현실의 실체는 어떤 것인지에 관한 생각은 바로 여기서 '유아론'이라는 단어와 함께 시작한다.


유아론
  유아론이란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의식밖에 없으며 그 외의 모든 것은 자신의 인지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관념론이다. 이같은 인식은 회의주의에서 시작되는데, 모든 것의 실존에 관해 의심하다보면 결국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고 존재에 대한 확신은 어디까지나 나의 의식 안에서의 존재로 국한된다. 유아론적 세계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의 의식의 틀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식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우주만물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며, 오브라이언의 말과 같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유아론과 오브라이언의 사상은 맥락을 같이한다. 또한 소설 속에서 당이 재산이나 행복 따위를 위한 수단으로서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순수한 권력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에게 있어 권력이란 인간 정신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 인간 정신에 대한 통제는 곧 우주만물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권력은 수단이 아닌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브라이언은 당의 세계관과 유아론은 정반대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 이 발언은 앞서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2+2=5라거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은 지구를 돌고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이중사고에 의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식의 주장과는 분명 다르다.
  버클리는 17세기의 성직자로 유아론의 전형적인 틀을 확립한 인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유아론의 정형을 고안하며 동시에 이를 탈피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가 유아론을 극복할 방법으로 생각해낸 것은 다름아닌 신이었다. 그가 고안한 유아론의 전형적인 틀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사고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의식 밖의 실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초 개인적인 존재, 즉 신이 필요했다. 버클리의 생각에 인간은 초월적 존재로 인해 의식을 뛰어넘는 존재에 대한 확신이 가능하다. 거꾸로 말하자면 의식 밖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기 위해서는 신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러한 결론은 유아론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성질의 것이다. 객관적 실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윈스턴이 심문과정에서 오브라이언과 나누는 대화는 어쩐지 한사람의 독백 같기도 하다. 아마도 작가는 이 긴 대화를 통해 스스로 당의 세계관에 대하여 던져보았던 질문과 그에대한 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두사람의 대화에서 언급하듯 1984에서 당이 지배하는 오세아니아는 어찌보면 집단적 유아론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오브라이언을 통해 '정반대'라고 분명히 밝힌 이유는 빅브라더의 존재 때문이다. 오브라이언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의식수준에서가 아니라 오직 당에 의해, 빅브라더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빅브라더는 개인의 의식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 즉 신이며 객관적 실체는 빅브라더에 의해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의 세계관은 버클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아론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책을 다 읽고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여지껏 이데아론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알게된 것 같아 부끄러우면서도 기뻤다. 내생각에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바깥은 1984에서의 빅브라더와 같은 의미다. 이데아란 빅브라더에 의해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 동굴안의 사람들은 유아론적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빗댄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만이 이데아의 세계를 볼 수 있다는 말은 여전히 인간 지성에 대한 오만으로 느껴진다. 내 생각에는 인간은 누구나 유아론적 세계에 갖혀 살 수 밖에 없으며 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아론은 인간 이성의 한계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점이다. 유아론에 갖혀 실체를 부인하게되면 인간은 이성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정체하게된다. 오직 증명할 수 없는 실체가 존재함을 받아들이고 사고를 진전시켜 나갈 때에만 유의미한 사고가 가능하다. 어쩌면 윈스턴이 심문과정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음에도 계속해서 당의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식의 논리에 맞서는 것은 작가의 이러한 믿음을 나타낸 것일지도 모른다.

0 개의 댓글:

CSS와 HTML의 개요와 기본구조 [미완]

0
개요
  「이 글은 실제 HTML과 CSS의 적용에 관해 알기쉽게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합니다. 따라서 불필요한 용어설명이나 세부사항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초보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데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때에따라서는 부정확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웹페이지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집을 짓는데에 비유할 수 있다. 건축가는 먼저 집이 들어설 터를 잡고 외벽을 세운다. 그 뒤에 방이 들어설 자리를 구상하여 각 방의 용도에따라 크기를 조절하며 뼈대를 세운다. 그런다음 용도에 맞게 벽지와 타일등을 선택하여 방을 꾸민다. 웹페이지도 이와 같이 생각 할 수 있다. 사용자는 먼저 웹페이지의 큰 틀이 될 컨테이너를 설정하고. 그 뒤에 컨테이너안에 집어넣을 여러 콘텐츠를 구상하여 각 콘텐츠의 용도에따라 크기를 조절하며 레이어를 구성한다. 그런다음 각 콘텐츠에 맞게 글씨체나 배경색등을 선택하여 레이어를 꾸민다.







여기서 뼈대를 세우는 과정이 HTML로 이루어지며 인테리어를 하는 과정이 CSS의 파트이다. HTML로 기본 뼈대를 설정하고 그 위에 CSS로 스타일을 입힌다고 생각하면 된다.


기본구조
  먼저 CSS로 특정스타일을 설정한 후 이름을 붙인다. 그런다음 HTML로 레이어를 구성하고 각 레이어에 맞게 CSS로 설정한 이름을 붙여준다. 이를테면 CSS로 다음과 같이 스타일을 설정한 후
배경스타일 - 물방울무늬
제목스타일 - 검은색 배경, 빨간색 글자, 큰 글씨
본문스타일 - 흰색 배경, 검은색 글자, 작은 글씨
HTML로 Container레이어와 그안에 포함되는 Header레이어와 Main-contents레이어를 생성한 뒤 다음과 같이 원하는 스타일을 지정해주면
Container - 배경스타일
Header - 제목스타일
Main-contents - 본문스타일
해당하는 레이어에 CSS로 설정한 값이 적용된다. HTML로도 스타일을 지정해 줄 수 있지만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같은 스타일의 레이어를 여러개 만들 경우 매번 해당하는 스타일을 지정하는 것 보다 CSS를 이용하는 것이 추후 수정

0 개의 댓글:

아Q정전 외 9편 - 루쉰

0
「광인일기」 10편 중 가장 긴장감 있게 읽었다. 제목 광인일기 처럼 소설의 주인공은 마을에서 미친사람 취급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미친사람인지는 의심스럽다. 액자식 구성의 바깥부분에서 이야기 되듯이 나중에 관직까지 오르는 그의 행적은 그가 정말로 미친사람이었는지 더욱더 의심스럽게 할 뿐이다.
  이야기에서 마을사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을 행하고 있다는 '진실'을 알아낸 광인은 마을에서 미친사람 취급을 받으며 그의 말은 모두 미친사람의 말로 매도된다. 표면적으로는 당시 중국에 실존하던 식인풍습을 비판하는 듯 하지만 조금 그 속내를 살펴보면 다른 상징적 의미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식인풍습은 중국의 봉건제도를, 마을 사람들은 봉건제도에 순응하는 민중들을, 광인은 개혁을 주창하는 선구자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광인과 한 젊은 청년의 대화에서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광인이 "옳은 일인가?" 하고 묻자 젊은이는 계속해서 대답을 회피하다가는 결국 "당신하고 그런걸 따지고 싶지는 않아요. 어쨌든 당신은 그런 소릴 하면 안되요.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잘못이야"라고 해버린다. 개혁사상에 대해 듣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이유를 불문하고 개혁사상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민중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이 '개혁'은 민중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해설에서는 '민중의 자학'이라는 적절한 말로 표현했다. 또한 광인이 자신역시 무의식중에 누이동생의 고기를 몇점 먹었을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장면에서는 자신 역시 봉건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선구자의 자아성찰적인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아Q정전」 아Q의 모습이 매우 유쾌하며 작품 전반적으로 해학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시대상과 민중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당시의 모순적인 관습과 사상들을 부각시킨다. 소련의 작가 고리키는 아Q가 불쌍하여 눈물을 흘렸다지만 나는 눈물은 나오지 않고 쓴 웃음만 지어질 뿐이었다. 아마 만화 둘리에서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어른이 된 것이라는 말처럼 나는 아직 어려서 아Q 그저 재밌는가보다.

「복을 비는 제사」 매우 감명깊었다. 샹린댁은 결혼을 하였으나 곧 과부가 되고 시어미 마음대로 팔려다니는 종같은 신세가 되어 이를 벗어나고자 노진으로 도망을 온다. 하지만 도중에 다시 끌려가서는 억지로 혼인을 올려 원치않는 정사를 치르고 아이까지 낳는다. 운명에 순종함으로써 비로소 행복에 가까워 졌을 때 다시 남편이 병으로 죽고 아이마저 잃은 샹린댁의 모습이 성실하고 명민하며 진중했던 그녀의 노진에서의 모습과 대치되어 민중이 겪는 아픔을 절절히 느끼게 한다. "저는 바보였어요, 정말. 눈이 올 때만 짐승들이 산속에 먹을게 없으니까 마을로 내려오는 줄 알았죠.(…중략…) 그 애가 풀숲에 쓰러져 있는 거에요. 뱃속의 창자를 벌써 다 먹혀 버렸는데, 그래도 손에는 그 소쿠리를 꼭 잡고 있었어요"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노진으로 돌아 왔을 때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아이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투영된 '그 소쿠리'뿐이었다. 이리에 물려죽은 아이 이야기를 한도 끝도 없이 반복한 끝에 '자신의 슬픔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저작되고 감상되어 이미 찌꺼기만 남았고 이제는 오직 혐오와 타기의 대상일 뿐임을 그녀도 어렴풋이 느끼지만 여전히 소쿠리며 콘 같은 물건에서 그 이야기를 끌어내고 싶어하는 그녀의 모습은 내 마음을 진정으로 슬프게 했다.

0 개의 댓글:

세월호 사건에 대하여

0
  세월호 사건은 나에게 슬픔과 좌절보다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 여러가지로 생각을 거듭해 본 결과 나는 세월호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 입시와 취업에 있다는 데 까지 이르렀다. 세월호 사건은 단순히 선장 잘못이네 선원 잘못이네 실 소유주 잘못이네 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도덕 수준이나 탓하며 넘어 가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다. 만약 그들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키를 잡았다면, 회사를 경영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일까? 지금 이순간에도 그들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은 없을까? 아니다. 단지 그들만의 잘못으로 생각 할 것이 아니라 이 사회 전체의 문제를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의 말 대로 세월호 사건에는 대한민국의 병폐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
  세월호 사건의 가장 직접적인 1차적 원인은 바로 직업정신 부족에 있다. 안전관리 미흡, 책임의식 부족 모두 올바른 직업정신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저지를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세월호 관련 일을 처리한 사람들만이 이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라행정, 비리, 관료주의 모두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하며 누구나 알면서도 저지르는, 알면서도 눈감아 주는 잘못들이다. 한마디로 애초에 이 사회는 직업의식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르는척 그렇게 굴러가고 있었다. 왜 일까. 대한민국은 국민정서가 원래 직업의식 따위는 무시하는 그런 민족인 걸까. 아니다. 원인은 사람이 아니라 환경이다. 이 사회에서 직장이란 돈을 벌기 위해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해야하는 사역장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일을 하는 이유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이며 돈이 되지 않는 일에 노력을 바치는 일은 바보취급 당하곤 한다. 바로 이러한 풍조가 사람들의 직업의식을 앗아간 것이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 한 조직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A라는 소방설비 회사를 경영하는 갑은 전공과 학점, 어학실력등을 보고 직원들을 고용한다. 피고용자들은 사회의 가장 평범한 구성원들로서 이들은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고 '들키지만 않는다면' 최대한 일을 간소화 하고자 한다. 어차피 통장에 찍히는 액수는 똑같은데 뭣하러 더 고생을 하냐는 식이다. 고용자 갑 입장에서는 이들이 나태하다고 생각하여(혹은 아직 업무를 더 처리할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여) 점점 더 많은 일을 요구하게 된다. 더 많은 일을 하게 된 피고용자들은 자체적으로 더 많은 '생략'과 '간소화'를 시키며 이에 대응하게 되고 어느 시점에 이르르면 생략과 간소화로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한 업무들만 하루 종일 잔뜩 처리하는 신세가 된다. 뭔가 일이 터질 때 까지 이런식으로 이 조직은 굴러간다.
  바로 이런 과정을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겪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속물적인 생각들이 더이상은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는 지경까지 우리는 오게 된 걸까?
  나는 그 이유가 다름아니라 잘못된 입시(혹은 교육)제도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해 대학이 인생의 전부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반해,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곳에 들어가기는 너무 어렵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죄인 것 마냥 여겨지고 있으며 부모들은 자식들이 죄 짓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는 식으로 아이들을 채찍질 하고 있다. 아이들은 목적의식 없이 끊임없이 공부를 강요받으며 거짓 꿈, 거짓 봉사로 가짜 자기소개서를 쓰는 훈련을 몇년 씩 받고 흥미도 느낄 새 없이 엄청난 양의 정보를 머리에 쑤셔박아야 하는 처지이다. 목적의식 따위 있을리가 없다. 허울좋은 입학사정관제로 인해 수많은 '거짓 꿈과 비전'들을 준비 해 보았을 뿐 자신에게 확신은 없다. 성적에 맞춰 과를 정하고 과에 맞춰 꿈과 비전을 수시로 바꾸어 적은 자기소개서로 가장 좋은 간판을 다는 것이 이나라 학생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아주 당연스럽게 여겨지고 있다. 스스로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은 없이 상업적세뇌에 찌들어 누군가 잘 포장해서 준비해 둔 수많은 '인생'품목들 중 내가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것을 선택하는 백화점식 선택만이 학생들이 할 수 있는, 해야하는 것의 전부이다. 대학 신입생 중 고작해서 한 과에 한 두명 정도나 자기가 원해서 선택한 과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나마도 확신없이 세뇌받은 대로 말하는 것이 고작이라 생각되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이 현실이다. 대학에 들어가면 그 뒤엔 예전처럼 정당한 권리를 위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고, 사회정의를 외치며 머리에 띠라도 멜 수 있을까? 아니다. 이젠 더이상 대학에서도 그럴 여유는 없다. 대학생들은 더이상 부조리에 대항하여 젊을 피를 뿌릴 수 있는 그런 처지가 아니다. 당장 먹고 살기가 막막한 그들은 취업을 위해 고등학생 때 했던 것과 똑같이 거짓 꿈과 비전을, 이번에는 회사에 맞추어 설정하느라 시간이 없다. 명문대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은 더더욱 그렇다. 사회 부조리에는 단지 냉소적으로 "세상이 다 그렇지 뭐"하고 넘어갈 뿐이다. 이들에게 직업정신을 기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세월호 사건의 원인을 입시, 취업과 연관짓게 되었다. 입시와 취업이 세월호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며 이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언제 또 다시 이런 참극이 벌어져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기는 조금 조심스럽다. 입시와 취업 교육과열은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문제인데다 다른 수많은 외적 요소들 또한 강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내 나름대로 이들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해결책을 모색해 보는 것이 좋겠다.

0 개의 댓글:

카라마조프家의 형제들 - 도스토예프스키 [미완]

0
서문-카라마조프家의 형제들
  오늘로써 드디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 읽었다. 전반부는 재미도 없고 도대체가 드미트리 카라마조프니 미챠니 미첸카니 하는 이름들이 영 익숙치가 않아서(경악스럽게도 이 세 이름은 모두 한 사람을 지칭하며 심지어 이 뿐 아니라 몇개의 다른 별명 또한 사용하기까지 한다!) 누가 누군지도 한참이나 헤매야 했다. 때문에 거의 억지로 읽다시피 하다가는 꽤 오랫동안 책을 덮어두기까지 했다. 어쨌든 후반부에 들어서는 극적인 전개와 매우 흥미로운 인물들의 광기가 내 머리를 헤집어 놓아 나조차도 이반이나 드미트리와 같이 거의 미친 사람 마냥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끔 했다. 이 소설은 너무 감명깊은 나머지 읽는 동안, 그리고 읽은 직후에 글을 쓰지 않으면 지금 나의 이 생생한, 그리고 깨진 유리의 파편들 마냥 제멋대로 흐트러진 생각들이 저 멀리 달아나 버려서, 결국은 이 유리조각들을 나중에라도 하나로 합쳐서 온전한 형태를 감상하지 못 할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에 마저 떨게 했다. 그러므로 지금 쓰는 이 글은 잠깐 생각해 본 끝에 두서없거나 앞뒤가 안맞는 부분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되는대로, 그러니까 정말 이 소설처럼,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외친 이반처럼 쓸 생각이다.(원래는 글의 순서나 문체 따위를 나중에 수정 할 생각이었지만 읽어보니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이편이 글 쓸 당시의 흥분이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아 그냥 두기로 했다.) 어쨌거나 나도 의식하곤 있지만 한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점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죄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체를 베낀 것이라는 점인데 내가 읽은 것은 번역본이기 때문에 그 것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문체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임이 분명함에도 어쨌거나 그의 신경질적이게 흐트러진 듯 하여 매력적인 글맵시가 어느정도는 나에게 전달 되었고 지금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에 대한 분석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설속에서 여러번 언급 된 바 물론 알료샤 이다. 하지만 정말로 흥미로운 인물은 바로 이반과 드미트리, 이 둘이며 이들이 바로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알료샤는 오히려 적극적 관찰자, 즉 사건에 개입하기도 하고 등장인물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하되 순전히 인물을 부각시키고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전개시키기 위한 인물에 가깝다. 이 점은 이반이나 드미트리가 시종일관 상반되는 이념과 싸우며 때론 앞과 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도 하는 입체적인 인물인데 반해 알료샤는 시종일관 (거의) 차분하고 평온하며 일관적인 생각을 가지는 단편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비록 드미트리와 이반이 난해하며 복합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이 세 형제를 놓고 봤을 때 각각 인간 심리의 세 부분을 대표한다고 생각된다. 이반은 이성을, 드미트리는 저열한 본능을, 알료샤는 높은 양심을 각각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미리 알리면서, 인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써 보도록 하겠다.

「알료샤」 앞서 이미 언급 했지만 알료샤는 이 소설의 표면적 주인공일 뿐 적극적 관찰자에 더 가깝다. 그는 드높은 정신을 가진 인물로써 양심에 대응하며 등장인물들은 그를 마치 자신의 양심과 같이 여겨 때론 두려워 하기도, 때론 진심을 솔직하게 내비치며 참회하기도, 또 다른 경우에는 비아냥거리며 무시하기도 한다. 그는 양심, 마음의 가장 진실된 부분이기 때문에 알료샤를 통해서 독자는 다른 등장인물들의 본심이나 또는 진실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드미트리나 이반이 알료샤에게 자신의 본심을 말 할 때 뿐 아니라 콜랴나 그루셴카, 카챠 역시 주로 알료샤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며(이 점에서 이 소설은 이해하기 매우 쉬운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알료샤를 속이거나 사실을 숨기거나 두려워 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등장인물이 양심의 가책을 피하려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콜랴가 알료샤에게 모종의 압박감, 심지어 두려운마저 느끼는 장면이나 드미트리가 알료샤에게 자신이 부친을 죽이지 않았음을 믿는지 물으며 겁에 질리는 장면이나 이반이 탈옥계획을 세우며 이를 알료샤에게는 숨기려 하는 모습 등 여러장면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즉 알료샤는 양심 그 자체이며 등장인물들이 알료샤에게 하는 말은 자신의 양심에게 하는 말이고 알료샤를 속이거나 두려워 하는 것은 자신의 양심을 속이려 하거나 가책을 두려워하는 행동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반」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자기 나름의 철학적 견해를 오만하리만큼 신뢰하는 인물로서 현대적인(이성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인간상이다. 그러나 입체적 인물로서 자신의 견해와는 다른 어떠한 믿음이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다가 후에 변화를 겪게되면서 이를 갑자기 깨닫고는 거의 미쳐버린다. 그러니까 스메르쟈코프가 말했듯이, 전에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하면서 제 아비를 죽이도록 사주 해 놓고는 (이 사실에 관한한 나는 스메르쟈코프의 말이 전적으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반은 아버지를 떠나오며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었음을 스스로도 이상하게 여긴다. 이는 이반이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틀어막아 버렸으나 그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새어나와 표출되는 그의 본심을 부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여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양심이 두려운 나머지 스스로도 자신이 그러한 일을 했다는 것 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순간 갑자기 모든 것을 깨닫고는 그 자신이 부정하던 신, 즉 절대적인 어떤 판단에 따른 고통 때문에 미쳐버리고만다. 아무리 잘난 듯 한 이성이라도 양심이나 도덕 따위를 제맘대로 무시하고 설정할 수 있는 상위에 위치하지는 않는다는, 즉 인간은 신이 도리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듯 하다.(이반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드미트리」 드미트리는 양심의 가책이나 자기비난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의 저열한 본능 앞에 무릎을 꿇는, 인간의 방탕한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반과는 다르게 끊임없이 알료샤를 의식하며 그로인해 고통받는다. 즉 인간의 본능은 추잡스럽고 방탕하지만 어쨌거나 일정부분은 양심에 의해 고통받을 만큼은 높은 것과 선한 것을 열렬히 원한다는 것이다.
「스메르쟈코프·악마·표도르」 스메르쟈코프와 악마는 이 소설에서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죄악의 극치를 보여준다. ※ 해설에 따르면 스메르쟈코프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등장인물들 중 유일하게 거의 순수한 악에 가깝다고 한다. 이반의 일부(적어도 개별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인 악마를 제외하면 스메르쟈코프는 친부살해라는 죄악에 의해 심적인 동요를 겪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며 죽는 그 순간까지 세상을 향한 적의에 가득 차 있다. 게다가 그는 출생일화가 매우 특이한데, 표도르 카라마죠프의 부도덕한 행위로 인해 마을의 백치가 그를 임신하고 밤중에 그녀가 표도르의 집에서 그를 낳은 뒤 숨지는 그 이야기는 마치 사탄의 탄생을 연상케 한다. 스메르쟈코프는 어릴 때 부터 이미 어둡고 사악한 면모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메르쟈코프가 표도르 카라마죠프 살해에 대한 나름의 정당성을 구축하는 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 중 한명은 바로 표도르 카라마죠프 그 자신이다. 표도르는 이반과 같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식의 논리를 고의든 아니든 스메르쟈코프에게 가르쳤으며 이 논리를 바탕으로 스메르쟈코프는 표도르 살해를 정당화한다. 따라서 표도르의 죽음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식의 논리에 의한 자기파멸로도 볼 수 있다.

주요 사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로서 사건은 단지 등장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의 개연성 보다는 그 사건으로 인해 들어나는 인물의 심리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한편에서는 일류샤의 죽음을 두고 그 아버지와 콜랴가 주축이 되어 흘러가는 이야기가 진행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드미트리와 그의 아버지가 그루셴카를 두고 대립하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두 사건은 개연성은 떨어지지만 방금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의 심리이기 때문에 각각의 사건에서 보이는 인물들의 심리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을 살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재판」   드미트리의 재판에서 각종 진술과 물적 증거, 변론, 질의응답은 사건의 전말이나 진상을 증명하는 객관적 증거라기 보다는 개개인(특히 드미트리)의 성품에 대한 평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드미트리가 도덕적으로 질이 낮은 사람이라면 그가 유죄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는 죄가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드미트리의 변호인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이런식으로 심리학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사건을 해석하면 같은 방식으로 정반대의 결론역시 도출해 낼 수 있다. 만일 당시 과학기술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재판이 이런식으로 허술하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면 내 생각에 작가가 이런식으로 재판을 구성한 것은 이 재판이 소설속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수단이 되길 원한 것이 아니라 각 인물의 성격적 극단을 이끌어 내어 인간의 본질을 결론짓기 위해서 라고 여겨진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죽이러 갔던 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을 되짚어보면서, 알료샤와 카체리나, 그루셴카는 증인으로써 드미트리에 대해 다른 많은 사람에게 증언을 하면서, 이반은 악마와의 대면을 통해 인물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재판 중 가장 극적인 사건은 이반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노라 선언하고 그 직후 카체리나가 드미트리가 적었던 편지를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며 자신의 진술을 뒤엎고 드미트리를 친부살해의 진범으로 지목하며 졸도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카체리나를 통해 그녀가 지향했던 그 고귀함이라는 것에 의해 만들어진 얄팍한 믿음이 얼마나 쉽게 포기되는지 볼 수 있다.
「일류샤의 장례」  
「리자의 변화」  

0 개의 댓글:

수필 - 피천득

0
서문
  이제껏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 두권 있습니다. 하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고 다른 하나는 琴兒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 입니다. 전자는 나의 이성적 영역에, 후자는 나의 감성적 영역에 큰 잔상을 남겼습니다. 나는 머리는 도킨스에게, 마음은 피천득 선생님께 빚진 셈입니다. 두 책은 언제나 나로하여금 그들을 떠올리게 하고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하여 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금아 선생님을 만나기 전 나는 머리만 무거워 휘청거리곤 했는데 선생님을 만나곤 조금 바로잡힌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금아 선생님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합니다. 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 알았더라면 더 많은 생각을 풍부하게 할 수 있었을 것도 같고, 주춤주춤 마음 상했던 일도 조금 적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다못해 남들 앞에서 좀 아는체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그러나 이제라도 알고 있는 것은 다행인 일입니다. 정말 다행인 일 입니다.   <추가> 수필집을 읽으면서, 읽고나서 느낀바가 많았으나 게으른 탓에 글을 몇편 쓰지 못한 채 그 귀한 상념들을 그냥 보내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편 안되지만 그렇기에 더 귀한 줄 알고 정리하여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후에 기회가 된다면 조금씩 추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안정」 수필집 중 가장 인상깊은 구절을 뽑자면 이 구절일 것이다. 이 '마음의 안정'이란 무기력으로부터 오는 모든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말한다. 무디어진 지성과 둔해진 감수성에 대한 슬픈 위안이다. 내가 어렴풋이 느끼기만 하던 불편한 사실을 저 대목으로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무기력으로 부터 비롯된 무관심을 '성숙'이나 '평온'과 같은 그럴듯 한 말로 치장해 왔던 것이다. 선생님께선 또 이런 글도 남기셨다. 늙은이가 젊은 사람 같이 가슴이 뜨겁다면 자랑할만한 일이지만 젊은 사람이 늙은이와 같이 관조하는 태도로 세상을 사는 것는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이 글들을 읽고 나서야 나는 나이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동안 분수에 맞지도 않게 늙은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 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달았다.   <추가>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이와 비슷한 생각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보여준다. '마음의 인상들을 계산하여 받아들이고 열렬하기는 커녕 그저 뜨뜻미지근한 정도로만 사랑할 줄 알며 정확하긴 하되 나이에 비해 너무도 논리적인 그렇기 때문에 값싼 그런 청년이라면, (…중략…)일관되게 논리적이어서 핑계나 대는 청년은 희망이 별로 없으며, 그건 싸구려 인생이다.'
「말솜씨」 화제의 빈곤은 지식의 빈곤, 경험의 빈곤, 감정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요, 말솜씨가 없다는 것은 그 원인이 불투명한 사고방식에 있다.   1년 전 쯤인가 이와 비슷한 글을 쓴 적이 있다.('13. 2. 11. 말과 표현. 블로그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입대한 뒤 공감 공군사랑학교에서 이렇게 써져 있는 것을 봤다. 말을 잘 못하는 것은 화제거리가 없다는 것이고 화제거리가 없다는 것은 당신이 잘 알고 있는 것도 관심 있는 것도 없다는 얘기라고. 셋 다 같은 맥락이다. 그 것이 나로써는 선생님과 같은 생각을 공유한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바로 저 지식의 빈곤과 경험의 빈곤과 감정의 빈곤으로 화제의 빈곤을 겪고 있는 것이 나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군사랑학교의 글쓴이가 충고를 한마디 해 주었다.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쉽게 화제거리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헌데 그것 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금아 선생님과 춘원 이광수」 어제였는지 요새 줄야근이라 날짜 감각이 흐릿하긴 하지만 최근 춘원 이광수에 대하여 찾아 보았습니다. 그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피천득 선생님의 글에서 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광수에 대해 회고하시다 좋은 말 끝에 '1937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더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을까' 하고 써 놓으셨습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여 책을 덮고 사지방에 가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알아보니 이광수는 일제 강점기 변절한 지식인의 대표격이라 하였습니다. 대표작 '무정'으로 큰 인기를 얻고 독립신문 편집장을 할 정도로 애국적이던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고심 끝에 국내에서의 활동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중일 전쟁을 거쳐 37년 투옥되었다가 나온 뒤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을 시작하였다 합니다. 이후 해방이 도자 그는 '나의 고백'을 집필해 그를 비롯한 친일파들의 행각이 오로지 애국심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는 등의 변을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말대로 이광수가 거짓을 모르는 사내였다면 이광수는 그 자신이 한 변처럼 비뚤어진 애국심의 결론이 친일이었던 것이고, 그리 믿고 싶습니다만 진실을 알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죄인이 하나 늘었다는 것은 슬픈 일 입니다.

0 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