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 조지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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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984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 스탈린 주의와의 비교이거나 개성의 상실, 비팍적 사고의 부재와 같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우려이다. 하지만 나는 전체주의의 잔악성이나 체제에 의한 개인의 파멸 보다는 빅브라더의 세계, 당이 구축해 놓은 현실에 대해 생각해봤다. 소설속에서 빅브라더로 대표되는 당은 모든 개인을 완벽하게 통제하려한다. 이중사고를 강요하며 과거를 조작하고 당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을 대중에게 심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여기서 이중사고란 작중에서 필요에 의해 스스로의 기억을 기술적으로 조작하는 능력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예를들어 사과는 정육면체에 가깝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게되면 사과는 둥글지 않으며 정육면체에 가깝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곤 곧 그러한 기만행위를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사과는 정육면체 모양이며 지금까지 죽 그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작중에서 오브라이언이라는 인물은 당에 반하는 사상을 지닌 윈스턴을 고문하며 앞서 얘기한 이중사고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정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물질도 지배할 수 있네. 실재란 머릿속에 있지…(중략)…무엇이든 할 수 있다네. 원한다면 비누방울처럼 이 마루 위를 둥둥 떠다닐 수도 있지." 윈스턴은 이러한 세계관은 유아론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려 하지만 오브라이언은 그런 윈스턴에게 "이건 유아론이 아니네…(중략)…사실은 정 반대이지."하고 선수를 친다. 나는 바로 이부분에 주목했다. 빅브라더의 세계가 무엇인지, 감시와 통제, 과거조작으로 구축한 현실의 실체는 어떤 것인지에 관한 생각은 바로 여기서 '유아론'이라는 단어와 함께 시작한다.
유아론
유아론이란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의식밖에 없으며 그 외의 모든 것은 자신의 인지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관념론이다. 이같은 인식은 회의주의에서 시작되는데, 모든 것의 실존에 관해 의심하다보면 결국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고 존재에 대한 확신은 어디까지나 나의 의식 안에서의 존재로 국한된다. 유아론적 세계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의 의식의 틀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식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우주만물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며, 오브라이언의 말과 같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유아론과 오브라이언의 사상은 맥락을 같이한다. 또한 소설 속에서 당이 재산이나 행복 따위를 위한 수단으로서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순수한 권력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에게 있어 권력이란 인간 정신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 인간 정신에 대한 통제는 곧 우주만물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권력은 수단이 아닌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브라이언은 당의 세계관과 유아론은 정반대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 이 발언은 앞서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2+2=5라거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은 지구를 돌고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이중사고에 의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식의 주장과는 분명 다르다.
버클리는 17세기의 성직자로 유아론의 전형적인 틀을 확립한 인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유아론의 정형을 고안하며 동시에 이를 탈피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가 유아론을 극복할 방법으로 생각해낸 것은 다름아닌 신이었다. 그가 고안한 유아론의 전형적인 틀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사고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의식 밖의 실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초 개인적인 존재, 즉 신이 필요했다. 버클리의 생각에 인간은 초월적 존재로 인해 의식을 뛰어넘는 존재에 대한 확신이 가능하다. 거꾸로 말하자면 의식 밖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기 위해서는 신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러한 결론은 유아론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성질의 것이다. 객관적 실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윈스턴이 심문과정에서 오브라이언과 나누는 대화는 어쩐지 한사람의 독백 같기도 하다. 아마도 작가는 이 긴 대화를 통해 스스로 당의 세계관에 대하여 던져보았던 질문과 그에대한 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두사람의 대화에서 언급하듯 1984에서 당이 지배하는 오세아니아는 어찌보면 집단적 유아론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오브라이언을 통해 '정반대'라고 분명히 밝힌 이유는 빅브라더의 존재 때문이다. 오브라이언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의식수준에서가 아니라 오직 당에 의해, 빅브라더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빅브라더는 개인의 의식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 즉 신이며 객관적 실체는 빅브라더에 의해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의 세계관은 버클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아론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책을 다 읽고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여지껏 이데아론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알게된 것 같아 부끄러우면서도 기뻤다. 내생각에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바깥은 1984에서의 빅브라더와 같은 의미다. 이데아란 빅브라더에 의해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 동굴안의 사람들은 유아론적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빗댄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만이 이데아의 세계를 볼 수 있다는 말은 여전히 인간 지성에 대한 오만으로 느껴진다. 내 생각에는 인간은 누구나 유아론적 세계에 갖혀 살 수 밖에 없으며 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아론은 인간 이성의 한계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점이다. 유아론에 갖혀 실체를 부인하게되면 인간은 이성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정체하게된다. 오직 증명할 수 없는 실체가 존재함을 받아들이고 사고를 진전시켜 나갈 때에만 유의미한 사고가 가능하다. 어쩌면 윈스턴이 심문과정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음에도 계속해서 당의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식의 논리에 맞서는 것은 작가의 이러한 믿음을 나타낸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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