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일기」
10편 중 가장 긴장감 있게 읽었다. 제목 광인일기 처럼 소설의 주인공은 마을에서 미친사람 취급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미친사람인지는 의심스럽다. 액자식 구성의 바깥부분에서 이야기 되듯이 나중에 관직까지 오르는 그의 행적은 그가 정말로 미친사람이었는지 더욱더 의심스럽게 할 뿐이다.
이야기에서 마을사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을 행하고 있다는 '진실'을 알아낸 광인은 마을에서 미친사람 취급을 받으며 그의 말은 모두 미친사람의 말로 매도된다. 표면적으로는 당시 중국에 실존하던 식인풍습을 비판하는 듯 하지만 조금 그 속내를 살펴보면 다른 상징적 의미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식인풍습은 중국의 봉건제도를, 마을 사람들은 봉건제도에 순응하는 민중들을, 광인은 개혁을 주창하는 선구자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광인과 한 젊은 청년의 대화에서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광인이 "옳은 일인가?" 하고 묻자 젊은이는 계속해서 대답을 회피하다가는 결국 "당신하고 그런걸 따지고 싶지는 않아요. 어쨌든 당신은 그런 소릴 하면 안되요.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잘못이야"라고 해버린다. 개혁사상에 대해 듣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이유를 불문하고 개혁사상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민중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이 '개혁'은 민중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해설에서는 '민중의 자학'이라는 적절한 말로 표현했다. 또한 광인이 자신역시 무의식중에 누이동생의 고기를 몇점 먹었을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장면에서는 자신 역시 봉건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선구자의 자아성찰적인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아Q정전」 아Q의 모습이 매우 유쾌하며 작품 전반적으로 해학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시대상과 민중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당시의 모순적인 관습과 사상들을 부각시킨다. 소련의 작가 고리키는 아Q가 불쌍하여 눈물을 흘렸다지만 나는 눈물은 나오지 않고 쓴 웃음만 지어질 뿐이었다. 아마 만화 둘리에서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어른이 된 것이라는 말처럼 나는 아직 어려서 아Q 그저 재밌는가보다.
「복을 비는 제사」 매우 감명깊었다. 샹린댁은 결혼을 하였으나 곧 과부가 되고 시어미 마음대로 팔려다니는 종같은 신세가 되어 이를 벗어나고자 노진으로 도망을 온다. 하지만 도중에 다시 끌려가서는 억지로 혼인을 올려 원치않는 정사를 치르고 아이까지 낳는다. 운명에 순종함으로써 비로소 행복에 가까워 졌을 때 다시 남편이 병으로 죽고 아이마저 잃은 샹린댁의 모습이 성실하고 명민하며 진중했던 그녀의 노진에서의 모습과 대치되어 민중이 겪는 아픔을 절절히 느끼게 한다. "저는 바보였어요, 정말. 눈이 올 때만 짐승들이 산속에 먹을게 없으니까 마을로 내려오는 줄 알았죠.(…중략…) 그 애가 풀숲에 쓰러져 있는 거에요. 뱃속의 창자를 벌써 다 먹혀 버렸는데, 그래도 손에는 그 소쿠리를 꼭 잡고 있었어요"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노진으로 돌아 왔을 때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아이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투영된 '그 소쿠리'뿐이었다. 이리에 물려죽은 아이 이야기를 한도 끝도 없이 반복한 끝에 '자신의 슬픔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저작되고 감상되어 이미 찌꺼기만 남았고 이제는 오직 혐오와 타기의 대상일 뿐임을 그녀도 어렴풋이 느끼지만 여전히 소쿠리며 콘 같은 물건에서 그 이야기를 끌어내고 싶어하는 그녀의 모습은 내 마음을 진정으로 슬프게 했다.
이야기에서 마을사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을 행하고 있다는 '진실'을 알아낸 광인은 마을에서 미친사람 취급을 받으며 그의 말은 모두 미친사람의 말로 매도된다. 표면적으로는 당시 중국에 실존하던 식인풍습을 비판하는 듯 하지만 조금 그 속내를 살펴보면 다른 상징적 의미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식인풍습은 중국의 봉건제도를, 마을 사람들은 봉건제도에 순응하는 민중들을, 광인은 개혁을 주창하는 선구자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광인과 한 젊은 청년의 대화에서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광인이 "옳은 일인가?" 하고 묻자 젊은이는 계속해서 대답을 회피하다가는 결국 "당신하고 그런걸 따지고 싶지는 않아요. 어쨌든 당신은 그런 소릴 하면 안되요.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잘못이야"라고 해버린다. 개혁사상에 대해 듣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이유를 불문하고 개혁사상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민중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이 '개혁'은 민중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해설에서는 '민중의 자학'이라는 적절한 말로 표현했다. 또한 광인이 자신역시 무의식중에 누이동생의 고기를 몇점 먹었을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장면에서는 자신 역시 봉건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선구자의 자아성찰적인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아Q정전」 아Q의 모습이 매우 유쾌하며 작품 전반적으로 해학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시대상과 민중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당시의 모순적인 관습과 사상들을 부각시킨다. 소련의 작가 고리키는 아Q가 불쌍하여 눈물을 흘렸다지만 나는 눈물은 나오지 않고 쓴 웃음만 지어질 뿐이었다. 아마 만화 둘리에서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어른이 된 것이라는 말처럼 나는 아직 어려서 아Q 그저 재밌는가보다.
「복을 비는 제사」 매우 감명깊었다. 샹린댁은 결혼을 하였으나 곧 과부가 되고 시어미 마음대로 팔려다니는 종같은 신세가 되어 이를 벗어나고자 노진으로 도망을 온다. 하지만 도중에 다시 끌려가서는 억지로 혼인을 올려 원치않는 정사를 치르고 아이까지 낳는다. 운명에 순종함으로써 비로소 행복에 가까워 졌을 때 다시 남편이 병으로 죽고 아이마저 잃은 샹린댁의 모습이 성실하고 명민하며 진중했던 그녀의 노진에서의 모습과 대치되어 민중이 겪는 아픔을 절절히 느끼게 한다. "저는 바보였어요, 정말. 눈이 올 때만 짐승들이 산속에 먹을게 없으니까 마을로 내려오는 줄 알았죠.(…중략…) 그 애가 풀숲에 쓰러져 있는 거에요. 뱃속의 창자를 벌써 다 먹혀 버렸는데, 그래도 손에는 그 소쿠리를 꼭 잡고 있었어요"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노진으로 돌아 왔을 때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아이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투영된 '그 소쿠리'뿐이었다. 이리에 물려죽은 아이 이야기를 한도 끝도 없이 반복한 끝에 '자신의 슬픔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저작되고 감상되어 이미 찌꺼기만 남았고 이제는 오직 혐오와 타기의 대상일 뿐임을 그녀도 어렴풋이 느끼지만 여전히 소쿠리며 콘 같은 물건에서 그 이야기를 끌어내고 싶어하는 그녀의 모습은 내 마음을 진정으로 슬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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