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피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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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제껏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 두권 있습니다. 하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고 다른 하나는 琴兒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 입니다. 전자는 나의 이성적 영역에, 후자는 나의 감성적 영역에 큰 잔상을 남겼습니다. 나는 머리는 도킨스에게, 마음은 피천득 선생님께 빚진 셈입니다. 두 책은 언제나 나로하여금 그들을 떠올리게 하고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하여 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금아 선생님을 만나기 전 나는 머리만 무거워 휘청거리곤 했는데 선생님을 만나곤 조금 바로잡힌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금아 선생님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합니다. 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 알았더라면 더 많은 생각을 풍부하게 할 수 있었을 것도 같고, 주춤주춤 마음 상했던 일도 조금 적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다못해 남들 앞에서 좀 아는체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그러나 이제라도 알고 있는 것은 다행인 일입니다. 정말 다행인 일 입니다.   <추가> 수필집을 읽으면서, 읽고나서 느낀바가 많았으나 게으른 탓에 글을 몇편 쓰지 못한 채 그 귀한 상념들을 그냥 보내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편 안되지만 그렇기에 더 귀한 줄 알고 정리하여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후에 기회가 된다면 조금씩 추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안정」 수필집 중 가장 인상깊은 구절을 뽑자면 이 구절일 것이다. 이 '마음의 안정'이란 무기력으로부터 오는 모든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말한다. 무디어진 지성과 둔해진 감수성에 대한 슬픈 위안이다. 내가 어렴풋이 느끼기만 하던 불편한 사실을 저 대목으로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무기력으로 부터 비롯된 무관심을 '성숙'이나 '평온'과 같은 그럴듯 한 말로 치장해 왔던 것이다. 선생님께선 또 이런 글도 남기셨다. 늙은이가 젊은 사람 같이 가슴이 뜨겁다면 자랑할만한 일이지만 젊은 사람이 늙은이와 같이 관조하는 태도로 세상을 사는 것는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이 글들을 읽고 나서야 나는 나이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동안 분수에 맞지도 않게 늙은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 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달았다.   <추가>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이와 비슷한 생각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보여준다. '마음의 인상들을 계산하여 받아들이고 열렬하기는 커녕 그저 뜨뜻미지근한 정도로만 사랑할 줄 알며 정확하긴 하되 나이에 비해 너무도 논리적인 그렇기 때문에 값싼 그런 청년이라면, (…중략…)일관되게 논리적이어서 핑계나 대는 청년은 희망이 별로 없으며, 그건 싸구려 인생이다.'
「말솜씨」 화제의 빈곤은 지식의 빈곤, 경험의 빈곤, 감정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요, 말솜씨가 없다는 것은 그 원인이 불투명한 사고방식에 있다.   1년 전 쯤인가 이와 비슷한 글을 쓴 적이 있다.('13. 2. 11. 말과 표현. 블로그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입대한 뒤 공감 공군사랑학교에서 이렇게 써져 있는 것을 봤다. 말을 잘 못하는 것은 화제거리가 없다는 것이고 화제거리가 없다는 것은 당신이 잘 알고 있는 것도 관심 있는 것도 없다는 얘기라고. 셋 다 같은 맥락이다. 그 것이 나로써는 선생님과 같은 생각을 공유한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바로 저 지식의 빈곤과 경험의 빈곤과 감정의 빈곤으로 화제의 빈곤을 겪고 있는 것이 나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군사랑학교의 글쓴이가 충고를 한마디 해 주었다.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쉽게 화제거리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헌데 그것 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금아 선생님과 춘원 이광수」 어제였는지 요새 줄야근이라 날짜 감각이 흐릿하긴 하지만 최근 춘원 이광수에 대하여 찾아 보았습니다. 그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피천득 선생님의 글에서 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광수에 대해 회고하시다 좋은 말 끝에 '1937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더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을까' 하고 써 놓으셨습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여 책을 덮고 사지방에 가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알아보니 이광수는 일제 강점기 변절한 지식인의 대표격이라 하였습니다. 대표작 '무정'으로 큰 인기를 얻고 독립신문 편집장을 할 정도로 애국적이던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고심 끝에 국내에서의 활동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중일 전쟁을 거쳐 37년 투옥되었다가 나온 뒤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을 시작하였다 합니다. 이후 해방이 도자 그는 '나의 고백'을 집필해 그를 비롯한 친일파들의 행각이 오로지 애국심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는 등의 변을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말대로 이광수가 거짓을 모르는 사내였다면 이광수는 그 자신이 한 변처럼 비뚤어진 애국심의 결론이 친일이었던 것이고, 그리 믿고 싶습니다만 진실을 알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죄인이 하나 늘었다는 것은 슬픈 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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